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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요약과 해석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적 문제제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도덕의 계보>라는 딱딱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이 책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니체는 어떻게 하여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쉽지 않은 책이지만, 천천히 요약하며 니체의 생각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책의 제목에서 시작해보도록 한다. 우선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자. 도덕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지켜야 할 바람직한 행동기준

이것이 도덕의 사전적 정의이다. 상당히 모호하다. 바람직함이란 무엇일까…. 선한 행동…? 사회에 이로운 행동..? 순환논리에 불과한 설명이다.

도덕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이에 대해 명료하게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이 등장한다. 니체는 계보학을 통해 ‘도덕’이라는 단어의 기원부터 현재까지의 발전과정을 연구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자신의 명료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그에게 도덕이란 두 가지 종류의 대립과정으로 다가온다. 바로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의 대립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도덕적으로 판단해야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선함과 악함을 도덕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악한 사람이다. 그는 영토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음(탁월함, 능력)과 나쁨(저열함, 비겁함)을 도덕의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뛰어난 리더쉽으로 국가의 이익을 증진한 그는 좋은 사람이다. 많은 위인전에서 그를 다루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니체는 첫번째 기준을 노예도덕으로, 두번째 도덕을 주인도덕으로 정의한다. 나폴레옹처럼 강인하고 탁월한 자는 자기자신을 긍정할 줄 안다.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좋음’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반면 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힘없고 저열하고 비겁하여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나쁨’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한편, 이들 ‘나쁜’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에 대해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그들은 ‘좋은’사람을 힘으로 복수할 수 없기때문에,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좋은’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원망하고 그들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 한다. “저들은 힘없는 약한자를 괴롭히는 악한 자이며, 우리는 저들과 달리 본성에 지배받지 않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선한자이다!”

이렇게하여 지상에 도덕이라는 단어가 모순적인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보았을때, 노예도덕이 주인도덕에 대해 승리한 것은 명백하다.

어떻게 노예도덕이 승리하였을까. 무력감과 자기기만에 가득 찬 약한 자들은 약함은 자신들의 선택이었고, 약하게 존재함을 공적화한다.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선함으로 포장하고, 자신들을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약한 인간은 정신적인 방법으로 아주 교활하고 교묘하게 강한 인간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강한 자들은 그들이 강한 힘을 가진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모순에 빠진다.

니체는 이러한 노예도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위의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의 작용, 맹수성, 자연스러운 활력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악한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활동적인 일들은, 안식일, 휴식, 평화와 같은 수동적인 것들로 바뀌었다. 강하게 존재하는 것은 악이되었고, 인간이라는 맹수는 온순한 가축으로 길들여졌다. 인간은 더 선량해지고, 더 천박해지고, 더 하찮아지게 된다.

한편, 약한 자들이 자신들을 포장하는데 사용한 ‘정의’라는 단어는 원래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정의란 ‘모든 것은 변상될 수 있고 변상되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믿으며 ‘서로 타협하고 조정할 수 있도록 노력(강제)하려는 선한 의지이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사람은 사회를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되면서,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상호작용의 핵심은 ‘약속’이다. 약속을 통해 인간은 예측가능성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믿으며, 공동체는 안정적으로 유지가 된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자기자신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이다. 이 주권자로서의 인간으로 부터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양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거나 약속을 망각하는 약한 사람들이다. 약속을 통해 빚을 진 이들 채무자에게, 채권자는 물질적인 형벌을 통해 지배감과 우월감이라는 변상을 받고자 했다. 그는 형벌을 통해 자신의 힘의 작용을 맛볼 수 있었다. 형벌은 ‘모든 것은 변상될 수 있고 변상되어야만 한다’는 원칙 아래 시행되었고, 이는 정의의 작용이었다.

이러한 형벌의 정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범죄자가 형벌을 받는 이유는 범죄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나 형벌의 모든 원초적인 모습이 잔인성과 폭력성을 띄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형벌의 절차가 먼저 존재했고, 의미와 목적은 그것에 덛붙여진 것에 불과하다.

‘어떤 일의 발생 원인은 그것의 궁극적인 유용성, 실제적인 사용과 목적과 철저히 분리되어있다.’

이렇게 말을해도 아직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에게 자신의 행동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 죄책감, 양심의 가책,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더 선한 존재로 교화시키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형벌을 받는 범죄자는 그가 받는 형벌이 그 자신이 일으킨 죄와 이름만 다를 뿐이지 본질은 같다는 점을 깨닫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점 등에서). 그에게 형벌은 교화와 같은 복잡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단지 형벌을 통해 욕망을 제어할 수 있게 되고, 다음에는 죄를 더 교묘하게 꾸며야겠다는 영리함을 가지게 되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권력자에게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이 것이 형벌의 효과이자 본질이자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죄의식’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공동체가 강해져 국가가 형성되고 더 강해진 권력아래 형벌과 법을 통해 약한 인간들은 민중으로 길들여진다. 그들은 힘으로 국가에 대항할 수 없기에, 그들 내면의 야수성은 그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즉 형벌을 통해 고통받을때 그들은 형벌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는다. 이것이 죄의식이자, 양심의 가책의 유래이다.

이 죄의식의 개념은, 민중을 ‘도덕화’하는데 천재적인 수완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 열매를 맺는다.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민중 앞에서, 그는 그들의 죄를 모두 떠받고자 십자가에 매달린다. 죄를 짓고 있는 그들 앞에 신이 스스로 그들을 구원하고자 목숨을 바친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구원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상환할 수 없는 영원한 빚을 지게 된다. 이것이 원죄의 유래이다. 이 상환 불가능한 원죄는, 민중을 형벌의 고통보다 더 강하게 짓누른다. 결국 민중은 자가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태어났을때부터 영원한 죄를 지고 있으며, 자신의 본성을 더러운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중은 더 비이기적이며 더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피를 이어받은 성직자는 이와 같은 흐름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그의 본성(힘)의 자연스러운 작용이었다.

그는 국가와 권력의 지배아래 삶의 패배감과 퇴화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 민중들의 구원자이자, 의사이자, 목자가 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무리를 형성하고, 보존하고, 확장하여 자신의 권력과 힘의 작용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의사였지만, 그의 치료방식은 참으로 잔인하고 교활했다. 그는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상처에 독을 뿌렸다. 그는 고통받는 자의 원한을 강한 자들로부터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놓는다.

고통받는 자들이 원한과 복수심을 가지는 이유는, 생리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배출하여 고통을 마비시키려는 것이다. 즉 고통의 원인과 책임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그들에게 “너만이 그것에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며 원한과 책임의 방향을 내부로 전환시킨다. 고통의 원인을 찾은 민중은 병자에서 죄인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을 즐기게 되며, 역설적으로 더 많은 고통을 바라게 된다. ‘종교는 지상에 만연한 생리적 장애의 감정의 치료법이다.’

또한 그는 작은 기쁨들을 처방한다. 선행, 선물, 배려, 이웃사랑을 강조하며, 무리속에서 민중이 자신의 작은 권력(힘)의 작용을 맛볼 수 있는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생명력, 야수성, 인간 본성의 자연성을 부정하며 비이기적이고 나약함을 최고의 선으로 만듦으로써 도덕적 자위행위의 기회를 선사한다.

니체는 ‘인간은 의욕하지 않기 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한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고통 뿐만아니라 모든 것의 의미를 찾는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통해 인간은 신과 선, 그리고 악(죄)이라는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금욕주의를 통해 드디어 의미를 갖고 무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무를 의욕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과학의 등장으로 금욕주의적 가치가 붕괴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인간이라는 연극의 다음 장을 예고한다. 그는 과학이라는 학문은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장 새롭고 고귀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의 핵심이자 잔여물인 진리(의미)를 향한 의지를 똑같이 과학 안에서도 발견하는 것이다. 즉 금욕주의라는 가치가 붕괴될 미래에서, 인간은 최종적으로 ‘진리를 향한 인간의 의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란 것이다.

여기까지가 책에대한 간단한 요약이다. 핵심을 정리해보자.


모든 것은 힘의 작용이자 충돌

세상에는 수많은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각의 ‘힘’들은 제자신을 억압하는 수많은 다른 힘들을 넘어서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힘들이 작용하고 충돌하면서, 사회가 변하며 새로운 제도와 관념, 가치등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과정이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강한 힘(사람, 제도, 관념, 가치)가 더 약한 힘(사람, 제도, 관념, 가치)을 지배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것일 뿐이다. 위에서 책을 요약하면서 몇번 언급한 ‘힘(권력)의 작용을 즐긴다’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힘의 작용은 ‘좋은’사람 뿐만 아니라 ‘나쁜’사람도 모두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자 만물의 작용 원리이다.

문제는 이러한 힘의 작용이, ‘좋은’사람이 ‘나쁜’사람을 짓밟고 강림했듯이, 또는 ‘선한’사람이 인간 자신을 가축으로 길들였듯이 진보적인 방향으로는 쉽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니체는 이러한 고삐 풀린 힘의 작용을 ‘힘에의 의지’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힘에의 의지란 살아남아야만 하는 생명의 맹목적인 욕망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을 남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현실에서의 삶의 의지를 의미한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이다. 다만 ‘힘에의 의지’는 힘을 통해 ‘약한 사람’을 짓밟으라는 것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란,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기는 고통은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기 때문에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힘을 마음껏 추구하라는 것이다.


자기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충실한 삶

결국 돌고돌아 결론으로 왔다. 결국 핵심은 ‘자기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충실한 삶’ 을 살자는 것이다. 타인이 인위적으로 정한 도덕 등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자신만의 가치를 창출하려고 꾸준히 노력해야한다. 이는 항상 더 위를 바라보며,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의 인격 발달과 전체 인류의 고양을 위한 영웅적이고도 엄격한 자기 규율과 자아 극복이 중심이 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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